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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생활의 기록/보고 듣고 읽은 감상

혜초의 여행

by Cyprus 2024.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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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얼룩소에 썼던 글 백업

 

혜초는 704년 생으로, 다섯개의 천축국(동천축, 남천축, 중천축, 북천축, 서천축)을 여행하고 왕오천축국전이라는 글을 남겼다. 역사에 대한 소양은 매우 낮아 그의 여행의 종교적인 의미 등은 잘 모르겠고, 현대 교양인의 시각에서 그의 여행을 한 번 짚어보려고 한다. 

1. 경로
그의 여행을 정말 간략하게 기록해보면 이렇다.

- 704년, 신라 출신 (700년생이라는 설도 있음)
- 719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남
- 723년, 광저우에서 인도를 향한 여정을 시작함
- 727년, 당나라 안서도호부(쿠차)에 도착

그의 여행 경로를 현대의 지명으로 대애애충 묘사하면 이렇다
 
1) (바닷길) 광저우 -> 베트남 동해 -> 말라카해협 -> 미얀마 -> 인도 동부 (대충 캘커타 근처)
2) (동천축) 갠지스강 따라서 북서쪽으로 이동
3) (중천축) 바라나시 인근
4) (남천축) 대충 뭄바이 근처
5) (서천축)  대충 파키스탄의 하이데라바드 근처
6) (북천축)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이란(니샤푸르)까지 이동 후
7)  타지키스탄에 속하는 파미르 고원 등을 넘어서
8) 당나라 영토인 안서도호부가 위치했던 쿠차에 도착

쿠차가 당나라 안서도호부라고 하지만 현재의 위구르보다 더 서쪽, 현대 기준으로는 타지키스탄의 영토다. 
구글 지도에서 그의 여정을 따라 대충 점을 찍어보면 육로로만 대략 10,000 킬로미터 정도가 나온다. 특이한 것은 니샤푸르 등지는 불교 문명이 아닌 이슬람 문명이었을 것 같다.

불교신문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6542

도보여행으로 10,000 Km . 여기에 해로를 더하고, 또 쿠차에서 장안까지 이삼천 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합치면 더 긴 여행이 된다.


2. 여정의 난이도

혜초는 4년간 10,000 Km 를 걸었다.

현대 프랑스 기자인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은퇴 후 육십의 나이에 12,000Km의 도보 여행을 다녀왔다. 이 여정은 실크로드를 따라가는 것으로,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중국의 시안까지였고, 4년이 걸렸다. (연속 4년이 아니라, 중간에 질병 등으로 귀국해서 쉬다가 다시 그 지점부터 걷기를 했던 것 같다.)

현대였지만 그의 여행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도보길에는 분쟁지역도 있었고, 황무지도 있었고, 아무튼 어려운 난관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육십이 넘은 노인이었다.

하지만 혜초의 여행과 비교하면 어떨까. 분명히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여행이 더 유리한 점들이 있을 것이다. 그는 현대 문명의 도움을 받았다. 나침반이 있고, 가벼운 플라스틱 물병이 있고, 구급약, 정수제, 발이 편하고 튼튼한 신발, 고어텍스 셔츠, 훨씬 정확한 지도, 이런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문제가 있으면 그의 고국 프랑스로 쉽게 돌아가거나 대사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다르다.

그래도 아무튼 육십 노인 vs 이십대 청년이었으니 조건을 대충 쌤쌤이라고 치고. 거리와 시간이 대충 비슷하다. 10,000Km 정도의 거리를 4년에 걸쳐 걸은 것이다.

현대에도 어려운 거리인데다가 이방인을 환영하는 전근대 사회는 없었으니, 열 명이 가면 두세 명은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었으니, 정말로 큰 각오를 하지 않으면 떠나지 못하는 길이 맞다.


3. 구도 여행? 

그의 여행을 구도여행이라고 하는데, 구도여행이 뭘 의미할지를 생각해보면 좀 애매하다.
첫 번째 심상은 고독한 행각승이 맨발로 터덜터덜 걸으며, 언젠가 석가모니의 깨달음이 자기를 찾아오기를 비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근현대의 영화, 동화 등을 통해 각색된 심상일 것이다. 
두 번째 심상은 그 행각승이 유명한 고승을 만나 설법을 듣거나 또는 가르침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이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구법여행은 일종의 유학길이다. 학사나 석사를 마친 변방의 청년이 자기의 비용과 위험을 무릅쓰고 본산지에 교수의 노예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석사나 박사를 하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다.  현지에서 커리큘럼에 따라 공부를 배우며, 박사학위쯤 되었을 때 지도교수와 싸우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면서 선진사상을 배우는 것이다. 이건 여행이라기보다 유학이다. 

혜초보다 한 세기 전 여행을 떠났던 당나라 현장법사(서유기의 삼장법사 맞음)의 여행은 그런 여행이었던 것 같다. 그는 17년간 천축국을 다녀왔고, 귀국길에 육백여 권의 불경을 가지고 돌아왔다. 중역되거나 모호한 불경의 원본을 가져오고 번역을 하고... 

하지만 혜초의 여행은 4년이었다. 정말 걷기에도 바쁜 시간이다. 유학이라기보다 순례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한 가지 더 짚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혜초는 혼자 다녔을까? 아니면 종복을 데리고 다녔을까? 전근대 사회에서 종복은 인간으로 치지 않는 경향이 있고;; 누가 이런 문제를 궁금해하지도 않는 모양이라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런데 현장법사는 육백 권의 불경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육백 권을 누가 어떻게 들고 왔을까?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라면 세 명으로 가능하겠지만, 평범하고 불쌍한 대학원생이라면 열 명이 있더라도 곤란할 무게다. 당시 책이 지금보다 좀 가볍다고 치더라도, 책만 들고 오는 것이 아니라 도보여행의 갖은 살림살이를 모두 짊어져야 했다.

더 유명한 원효대사나 의상대사를 떠올려봐도, 왕족의 자제이거나, 후일 왕족과 결혼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높은 신분이었고, 봇짐을 싸매고 굴 속에 기어들어가서 해골물을 드링킹하는 이미지는 살짝 왜곡이 있지 않을까 싶다.

혜초가 여정은 어떻게 짰을까? 당나라에서 천축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그렇게까지 드문 일은 아니었다.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은 640년부터 690년 사이 천축국을 다녀온 61명에 대한 기록이라고 하는데, 이 61명은 중국인 41명, 신라인 8명, 고구려 1명, 티베트 2명, 베트남 4명, 강거국 1명, 고창국(타클라마칸 사막 북동쪽에 인접해 있던 고대국가) 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https://m.blog.naver.com/dlpul1010/221814379574)


4. 여행 후 

유학생이 아니라도 해외를 다녀오면 견문이 넓어진다. 여행은 1년만 다녀와도 인생이 달라진다. 4년간의 순례여행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여행을 마친 뒤 팔순이 넘어 입적할 때까지 당나라에 살았다.

근대 이전의 해외 경험, 특히 상위 문명에서의 경험은 본국으로 돌아왔을 때 생각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가진다. 일제 시대의 미국 박사학위는 대통령으로 인정될만큼 높은 것이라,

그의 여행은 공식적인 학위가 없었지만 (그런 게 있던 시절도 아니지만) 그는 당나라에서 많은 존경을 받고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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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충실하게 주석된 정수일 교수의 왕오천축국전 번역본 및 역주본이 있고, 
그 번역본 기반으로 정수일 교수가 직접 해설한 KBS 역사스페셜 촬영본이 있다.

https://youtu.be/J8H2Kt6ae9s?si=d54gvRBa7lLZ3wS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