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취미생활의 기록/보고 듣고 읽은 감상

1888년 재미조선공사관 일행의 프렌치 풀코스

by Cyprus 2024. 12. 28.
반응형
<언젠가 얼룩소에 썼던 글> 
 
1. 우선 재미조선공사관 일행이란, 구한말에 왕명으로 미국을 방문한 박정양(48세), 이완용(31세), 이하영(31세), 이채연(28세), 이상재(39세), 호레이스 알렌 (31세) 등을 말한다. 이 멤버들 하나하나가 캐릭터도 분명하고 훗날의 삶도 파란만장하다. 이완용은 그 이완용이 맞고, 이상재도 그 이상재가 맞다. 호레이스 알렌도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미국인 의사, 그 사람이 맞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2. 조선의 관료들이 공식적으로 미국을 방문한 첫 번째 사절은 1883년 "보빙사" 일행이었다.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고 첫 번째 방문으로,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변수 등등이 방문했었다. 민비의 조카였던 민영익이 전권대사였는데, 24세였다. 미국에서는 Prince로 불리웠다. 왕비의 조카를 프린스라고 하는게 맞나? 놀랍게도 영한사전을 찾아보면 왕자, 제후, 대공, 왕의 종친 등이 다 프린스라고 한다.

1883년 보빙사 일행은 미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심지어 조선말과 영어를 통역할 사람이 없어서, 조선어-> 일본어/중국어->영어로 통역하기 위해 일본인과 중국인 통역관을 두 명 대동했다. 일본인과 중국인 통역관이 통역을 잘 못하거나 거짓 통역을 할까봐 두 나라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갔던 것이다.  민영익이 미국 대통령에게 납죽 큰절을 올린 것도 유명한 해프닝이다.

▼ 보빙사 일행
기록 사진
3. 1888년에 조선공사관을 설립하기 위해 일행들은 미국 언어와 문화를 조금 더 알았다. 불과 오 년의 짧은 시간이지만 그 사이 많은 미국인이 조선으로 건너왔다. 알렌, 아펜젤러, 언더우드, 헐버트 등 유명한 미국인들을 포함해 많은 외국인들이 활동을 했다. 이완용은 육영공원을 다니며 영어를 배웠고, 이하영은 미국인의 하인으로 일하며 영어를 배웠다. 고종의 신임을 받던 의사 호레이스 알렌은 조선어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못 알아듣는 척 했다고는 한다.) 그리고 공사 일행이 부여받은 임무도 명확했다. 미국에 공사관을 설립하는 것. 그리고 200만 달러의 돈을 빌려오는 것. 이것도 참 흥미진진하고 파란만장한 이야기인데 다음 기회에... 

4. 미국 방문단은 당시 국가 예산의 3%를 여비로 썼다. 당시 조선의 연간 정부예산은 대략 140만 달러 정도로 추정된다. 그런데 당시 조선 공사관 일행이 미국을 다녀오는 여행경비는 대략 2만달러~3만달러였다. 원래 박정양은 훨씬 더 많은 수행원을 요구했지만 알렌이 다 쳐내고 깎아내서 10명 정도만 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 돈을 실제로 정부 예산에서 쓰지는 않은 것 같다. 보빙사로서 미국을 다녀왔던 민영익이 청나라에 밉보여 쫓겨난 뒤로는 홍콩에 거주하면서 고종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었던 것 같으며, 알렌은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민영익에게 2만 달러의 여비를 받아냈다.

돈이 있든 없든 그들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팰리스 호텔에서 묵었다. 팰리스 호텔은 놀랍게도 120년이 지난 아직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유서 깊은 호텔이다. 힐튼, 하이야트, 인터컨티넨털 등과 비슷한 숙박료를 받는 최고급 호텔이므로 당시에는 더욱 고급 호텔이었을 것이다. 1883년의 보빙사 일행도 이 호텔에 묵었고, 박정양은 자신의 일기에 제 6층 840호에 묵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호텔의 기록에는 당시 숙박료가 싱글룸 기준 최저 $1, 식사를 합치면 $3이었다. 박정양의 기록에는 숙소의 식대가 최소 $3, 최대 $10이다. 박정양의 기록에 숙소 비용은 숙박료가 아니라 식대라고 표현되는데, 옛 조선의 여관방들은 밥을 먹으면 잠은 무료인 시스템이라서 그럴 것 같다. 당시 미국 비숙련 노무자들의 임금이 하루 $1 달러였으니, 오늘날 감각으로 계산해보면 미국 최저 일당을 20만원으로 계산하면 숙박료는 대략 60만원~200만원 정도다.   

▼ 팰리스호텔의 1890년대 모습 
http://cprr.org/Museum/Palace_Hotel_SF/#images
5. 한식 보따리를 싸가지고 가긴 했다. 이들 일행이 배에 실은 짐보따리는 13개였는데 그 13개가 선실의 절반을 채웠다. 호레이스 알렌은 그 짐들이 대부분 김치와 건어물류라고 했다. 90년대 해외여행을 가던 한국인들의 짐보따리에 라면, 김치, 멸치, 김 등이 빠지지 않았던 것과 비슷하다.

당시 조선의 식생활에 삼첩반상 오첩반상 하는 이야기들을 가끔 하지만, 결국은 밥과 장이 중심이 되고 여름에는 신선한 야채, 겨울에는 보존 야채(김치), 여기에다 국과 다른 반찬이 더해지는 구조다.   

배에서는 이런 음식을 직접 해먹었다. 배에서 음식을 해먹는 풍경이 얼른 떠오르지 않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흔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행 배의 삼등석을 이용하는 것은 대부분 중국인 노동자들이었는데, 이들은 미국에서 받는 연봉이 300달러였는데 삼등석 배표가 100달러나 했다. 최대한 아끼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고. 그 틈에 끼어서 조선인들도 직접 밥을 해먹었을 것이다.   

▼ 태평양 횡단 증기선의 아스트랄한 삼등석 선실 풍경 .
하퍼스 위클리
하지만 팰리스 호텔에 취사도구가 있지도 않았을 것이고, 여정 중의 숙소에서 뭘 해먹을 여건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미국 식사는 서민의 단촐한 식사도 있지만, 호텔에서 제공하는 식사는 또 그렇게 단촐하지만도 않았을 것이다.

박정양이든 알렌이든 팰리스 호텔에서 뭘 먹었다거나 입에 맞네 안 맞네 하는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 무렵 신문에서 팰리스 호텔 주방장이 자신의 메뉴를 자랑한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열두 명 정도의 손님에게 제공하는 풀코스의 식탁인데, 프랑스식 정찬 메뉴로 보인다. 

재미공사관 일행이 이걸 정말로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팰리스 호텔에서 긴 여행 끝에 한두 끼 정도는 좋은 코스 음식을 먹었을 것이다. 또 외교관으로서 업무적으로 외국의 손님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이런 음식을 가끔 먹어야 했을 것이다. 정말로 식도락을 즐겼던 것이 아니라는 것만 인지하고, 심각하지 않게, 가볍게 읽어보자. (모르는 옛날식 조리 용어도 많고 영어가 아닌 것도 많아, 번역이 틀렸을 지도 모른다)
 

▼ 팰리스 호텔 주방장 특선 메뉴표   
출처 까먹음 ㅠ ㅠ

1. 우선 석화. 동부의 굴(Small Eastern Oysters in Shell)이라고 되어있는데... 설마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동부의 굴을 먹지는 않겠지?  

2. 다양한 오르되부르. 크래커나 바게뜨 위에 과일, 치즈, 연어, 캐비어를 얹은 가벼운 애피타이저다. 

3. 스프는 오이피클과 건포도로 만든 러시아식 짜리나 소스를 곁들인 맑은 수프(Consomme a la Czarina), 또는 프랑스식 아스파라거스 크림 스프(Creme d’Asperges Nouvelle Reine Hortense) 중 하나. 

4. 뜨거운 음식으로 어린 양의 췌장이나 흉선에 빵가루를 입혀서 튀긴 뚤루즈식 히다뇨 크로켓 (Croquette de ris d’Agneau Toulousaine)이 제공된다. 

5. 생선은 대공의 넙치살 요리(Fillets of Turbot a la Archiduc), 또는 민물 송어와 각종 야채를 기름종이에 싸서 굽듯이 찐 빠삐요뜨(Lake Trout en Papillotte)가 나온다. 

6. 가금류 요리는 어린 칠면조의 뱃속에 밤을 채워서 구운 요리(Young Turkey. Stuffed with chestnuts), 또는 콜리플라워와 함께 삶은 뇌조 요리(Bouled Grouse with cauliflower) 차례다.

아 젠장 배 터질 것 같은데... 또 나온다.

7. 앙뜨레(Entree), 즉 메인 음식은 테네시주 파라구트産 개구리 뒷다리 요리에 닭고기풍 무슬린 소스를 곁들인 것(Frogs’ Legs a la Farragut, Mousseline de Volaille Sonderano), 또는 송로버섯을 곁들인 메릴랜드産 민물거북(Terrapins a la Maryland, Truffes au Champagne a la Lucullus) 요리다. 헐 메인 요리가 개구리 아니면 거북이라니...

8. 로티스(Rotis)라고 부르는 로스트 요리가 또 나온다. 양고기 로스트(Selle d’Agneau a la Meuthe) 또는 큰흰죽지로 번역되는 야생오리 로스트(Canvasback Ducks au Celery) 차례다. 

배 터졌는데 아직 안 끝났나... 

9. 야채요리는 속을 채운 아티초크(Fonds d’Artichauds Garni de Polis), 프랑스식 줄기콩(haricots verts), 시저스 샐러드와 비슷한 양상치 속 요리(Coeurs de Laitue) 등이다. 

10. 차가운 음식으로 잘 섞어서 만든 수탉 젤리(Gelatine de Chapon sur Socle), 스트라스부르 식 푸아그라(Foie Gras de strasbourg)가 나온다.

11. 디저트는 케이크(Un Gateau), 설탕액을 공예품처럼 섬세하게 굳혀서 만든 쉬크르 필레(Sucre File), 아이스크림(Glace en Caisse) 

아... 먹는 이야기도 적당히 쓰면 배가 고파지는데, 이만큼은... 글만 썼는데도 입에서 기름이 흘러나올 것 같다. 느끼하고 배불러서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