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담 프라모델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고, 오리지널편의 주요 메카닉과 주인공, 큰 스토리라인 정도는 주워 들었다. 국민학생(초등학생 아님)의 필수 교양 아니던가... 하지만 막상 건담을 영상물로 접하지는 못했다.
처음 본 건담 애니메이션은 철혈의 오펀스였다. 오펀스는 Orphans, 고아이며, 철혈은 조직 명칭이다. 건담 오리지널 팬들은 무늬만 건담이고 전형적인 일본 조폭물이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내 취향에는 맞았다. 쓸데없이 비장한 면이 좋았다. 작품에 대해서는 욕인지 칭찬인지 모르겠는데 내 감상이 언제나 그렇다. 진심을 다해서 칭찬했다가 상대방이 애매한 표정을 짓던 기억이 좀 있다. ;; 아무튼 꽤 재밌게 봤던지라 기념으로 프라모델도 하나 사서 조립했다.
발바토스의 최종 진화형, 위악이 극에 달한 상황의 발바토스 루프스 렉스다. 프라모델 중에도 건담은 좀 흔한 느낌이라 좋아하지 않지만 철혈의 오펀스가 재밌었던 기념으로 산 것이고, 그 중 루프스 렉스를 택한 이유는 평범한 건담과 디자인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립된 프라가 멋있지는 않다. 애니메이션 속의 악마 같은 이미지가 실물 프라모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얼굴은 건담, 상체는 고릴라, 하체는 닭이라고 할까.
건담 더 퍼스트나 건담 오리지널도 꽤 재밌게 봤다. 이야기의 스케일이 크고 선이 굵었다. 그리고 어설프게 알던 스토리를 처음부터 보게 되는 즐거움도 있었고, 그렇게 본 더 퍼스트가 훨씬 더 압축되어 있는 오리지널도 재밌게 봤다. 그 이외에 몇 편을 보려고 했거나 봤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른 편들만큼 인상 깊지는 않다는 뜻이다.
수성의 마녀는 조금 으읭? 하는 표정을 지으며 보고 있다. 뭔가 일본식 한자 조어를 떠올리고 물속성? 방어 전문? 짐승 속성? 이런 상상을 했는데, 그냥 목성 화성의 친구 수성이었다. 수성에서 온 마녀... (이하 스포일러)
1편에서 우주 기지가 통째로 폐쇄되고 그곳에서 일하던 많은 직원들이 습격으로 죽게 되는 어두운 도입부는 좋았는데, 2편 이후 이야기의 스케일이 아주 작아진다. 우주의 파일럿 학원인 듯한 곳에서 파일럿 후보생들의 이야기로 바뀐다. 갑자기 학원물이 되어버리는데;;; 후보생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그 갈등을 풀기 위해 학칙에 의해 결투를 신청하면, 굉장히 유치한 서로의 조건을 교환한 뒤 모빌슈트를 입고 결투를 벌인다... 는 것이 이후 몇 화 동안 계속 이어지는 스토리다.
물론 건담 특유의 갈등구조가 있기는 하다. 지구인과 우주인(어시안과 스페시안) 사이의 갈등, 대 재벌들 사이의 가문간의 경쟁, 출신에 따른 차별, 권위적인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 그런데 갈등이 표현되고 해소되는 방식은 건담이라기보다 아동물, 학원물의 방식을 띄는 편이다. 갑툭튀로 결투하고 어린아이 같은 조건을 내거는 장면들 때문에 유치하지만 그냥 보기는 보는 정도.
등장인물들도 학원물의 성격을 띈다. 큰 잠재력을 깨닫지 못한 채 소극적이고 자신감 없이 주변에 휘둘리는 여자 주인공, 그 주변에는 츤데레소녀, 열혈바보, 권위적이지만 딸을 사랑하는 아빠, 척척박사 ... 등등 평면적이고 전형적인 인물 들이다.
프롤로그의 학살, 거기서 살아남은 프로스페라라는 인물의 떡밥이 이 아동물을 얼마만큼 수준 높게 끌어올려주느냐가 중요한 떡밥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분량이 적고, 떡밥을 회수하는 속도도 느린 편이라, 시즌 1이 끝난 시점에 그다지 밝혀진 게 많지 않다.
작화풍도 조금 특이해보인다. 건담인데 여성을 모티브로 했는지 허리가 잘록하고 얼굴은 각이 없이 동글동글하며 눈은 순정만화풍으로 초롱초롱하다. (조금 부담스럽다.)
건프라를 봐도... 에반게리온 이후의 많은 프라모델들이 허리 사이즈를 줄이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에반게리온이 존윅이나 이소룡, 아니면 경량급 복서의 날쌘 잔근육을 떠오르게 한다면, 수성의 마녀의 에어리얼은 어딘지 여성적인 곡선이 있는 호리호리함이다.
웨이브에서 오늘자 기준 단 세 편이 올라와있다. 그런데 매우 놀랍게도, 유튜브에 전편이 공개되어 있다. 씨즌1 기준 전편을 무료로 볼 수 있다. (불법이 아닌 공식 버전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