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해록 리뷰
최부는 1454년에 태어나서 조선 성종 시기에 벼슬을 하던 사람이다.
그는 1487년에 추쇄경차관이라는 벼슬을 받고 제주도에 부임했다. 추쇄경차관이라는 벼슬은 추노...를 하는 벼슬이다. 당대에도 도망간 노비나 부역기피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찾아오지 못하는 외진 곳으로 많이들 달아났었나보다.
하지만 부임한지 불과 세달이 지난 1월 30일에 부친의 부음을 듣게 된다. 곧 삼년 상을 치르기 위해 고향인 나주를 향해 일행 40명과 함께 배를 떠났다. 하지만 제주도를 얼마 벗어나지 못하고 폭풍을 만나, 바다위에서 십여 일을 표류하고 중국 절강성 임해현의 우두외양이라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다.
지방 관원이 상을 당해 돌아가는데 배에 탄 사람이 40명이나 된다. 실제 최부의 일행은 일곱 명이고, 35명이 제주의 사람으로서 배를 몰 격군과 선원, 그리고 해적들을 만나면 싸울 군인 등이다.
<표류 이야기>
해상에서 표류한 기록은 여느 서양의 여행기에서 표류를 하는 선장이나 상인들의 기록과 아주 비슷하다. 선원들끼리 싸움도 나고, 서로 원망도 하고, 그러던 와중에 다 같이 좌절해서 울기도 한다. 배를 타고 나가다가 고래도 만난다. 물을 뿜는 거대한 생물을 먼발치에서 보자 누군가가 "크면 배를 삼키고 작아도 배를 뒤집을 수 있습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스쳐가지만 다음번에 다시 만나면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라고 언급을 했다.
아무튼 조선 선비쯤 되면 표류 상황에서 점잖게 뒷짐을 지고 선비연 하거나, 아니면 당황하고 좌절해서 넋나간 행동을 할 것 같은데. 그러지 않고 선내에서 생긴 갈등을 조율하고 위기 상황의 의사결정을 해나간다. 직접 물을 퍼내거나 키를 잡았던 것 같지는 않지만.
물론 기록을 남긴 사람이 최부 본인이고, 더더구나 임금에게 바치기 위해 쓴 기록이기 때문에, 본인의 역할을 조금 과장했을 것이다. 악의적/의도적 과장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원래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법이니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일행의 좌장이 최부인 것도 맞다. 정말로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거나 선상 반란이 일어날 상황이 아니라면, 그가 사람들의 좌장 역할을 하는 것도 맞다.
이들 일행은 식수가 떨어져 마시지도 밥을 먹지도 못했지만, 또 비가 올 때는 옷을 펼쳐 비를 받고, 무인도에 잠시 내려 죽을 끓여먹기도 하면서 열흘 가량을 표류했다.
<육지에서의 고난>
처음 영파부 경계에 도착해서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게 해적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물도 주고 쉴곳도 안내해줬는데, 사람이 마흔 명이지만 표류에 시달린 몰골을 보더니 어느 순간 해적으로 변해서 창과 도끼를 들고 쳐들어왔다. 그리고 적의 괴수가 필담으로 이렇게 글을 썼다.
"나는 관음불이다. 네 마음을 꿰뚫어보니 네게는 금은이 있다. 찾아봐야겠다."
어 애꾸눈 한 분이 잠시 떠오르지만... 아무튼 창과 도끼를 옆에 두고 필담으로 저런 대화를 나누는 심정은 대체 어떨까. 아무튼 금은보화는 실제로 없었기에 없다고 버티고, 결국 흠씬 두들겨맞고 모든 물건을 다 빼앗기고, 최부의 목에도 작두가 들어왔다. 작두질에 실패해서 목숨을 간신히 남은 상태로 다시 표류가 시작되었다.
해적을 만난 뒤 일주일간의 표류는 더욱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이 때에는 배에 물이 들어왔을 때 최부도 직접 팔을 걷고 물을 푼 것으로 되어있다.
<마을에 도착은 했는데>
마을에 도착해서 최부와 다른 사람들이 논쟁을 했다.
"지난 번에는 관리의 위의를 보이지 않아 도적을 불러들여 죽을 뻔 했으니 임기응변으로 의관을 갖추십시오."
"너희는 어찌해 의를 해치는 길로 나를 이끄느냐? "
"죽음이 코앞인데 예의는 무슨 예의입니까. 우선 형편에 맞게 처신하시지요."
"상복을 벗고 예복을 입는 것은 효가 아니고,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은 신의가 아니다."
이 논쟁이 어처구니가 없는데 당시로서는 정말 중요한 문제였나보다. 부모가 돌아가신 죄인은 관복을 벗고 스스로 상복만 입고 있어야 하는데, 잠시 관복을 입고 관인 행세를 하라는 것을 거부하는 대화다. 최부가 너무 꼬장꼬장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먼 미래의 이야기지만 최부가 조선에 돌아가서 일주일간 왕명으로 이 여행기 "표해록"을 지어 바친 뒤 부친상을 시작했는데, 훗날 그가 상을 마치고 벼슬로 복귀하려고 할 때에 상복을 입은 사람이 글을 썼다는 이유로 인사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성종이 "내가 시켜서 썼다니까! "를 몇 번 시전했음에도, 누가 시켜서 뭘 했든간에 상사를 제대로 치르지 않은 것은 그의 잘못이라고 결론이 났다. 최부가 답답한 것인지 그 시대가 답답한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마을 사람들은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후추를 달라는 둥 (무역선이 다녔다는 뜻으로 보임) 어쩌는 둥, 가까스로 관원들을 만났지만 이 마을에서 빨리 나가라는 말이나 듣고, 그나마 어느 순간 관원들에게 이유도 모르고 체포되어 끌려가게 됐다.
다행히 호의적인 선비를 만나 필담을 나누는데,
"네가 상을 당해 간다니 주 문공의 <가례>를 행할 수 있느냐? "
"우리나라 사람은 상을 지킬 때에 모두 한결같이 <가례>를 준수하고 있소. 나도 마땅히 따르오."
이런 류의 필담을 나눈 뒤 그 선비가 말해주기를, "관원들이 너희를 왜적이라고 무고해 머리를 베어 공을 세우려고 도모했다. 그래서 먼저 왜선 열네 척이 변경을 침범해 사람들을 위협했다고 보고하고 너희를 죽이려고 했는데, 너희가 먼저 스스로 배를 버리고 사람이 많은 마을로 뛰어들어갔기 때문에 즉시 죽이지는 못했다. ..."
모르는 사이 또 한 번 목숨을 잃을 뻔 한 것이다.
<그 뒤로는 무난하게 조선까지>
그들의 파란만장한 고난이 끝없이 계속되진 않았다. 그에게 왜구라는 오해를 풀 것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는, 여권도 통신도 안 되던 시절이라 아주 원시적이지만 확실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너희 나라 지방은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 부와 주는 몇 개인가? 군량미는 약 얼마나 되느냐? 본지에서 나는 물건은 어떤 것이 비싼가? 읽은 시서 가운데 어느 경전을 숭상하느냐? 의관과 예약은 어느 시대의 제도를 따르느냐? 하나하나 쓰라. 그것으로 조사하겠다."
최부는 이런 질문들에 하나하나 대답하며, "우리는 소중화", "나는 공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조선의 신하" 이런 것들을 충분히 어필한 이후로는 큰 탈 없는 이동이 시작됐다.
북경으로 이동하는 길목마다 많은 중국인들을 만난다. 처음 만난 중국(명나라) 사람들은 신원 확인을 위해 공격적인 질문을 했다면, 이후에는 단순 호기심, 시를 얻으려는 사람, 특산물을 얻으려는 사람, 조선에 옛날에 다녀와서 마냥 반가운 사람...
주로 운하를 따라 배를 타고 가끔 육로도 걸으면서 북경에서 황성에 한 번 보고를 하고 (요즘 대통령을 한 번 만난다면 일정 잡기부터 의전 교육까지 받을 그런 상황도 한 일주일 정도 있었고), 아무튼 그렇게 조선으로 돌아왔다.